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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일년 넘게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쓰지 못했다.

그 일년 동안 내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봄부터 시작한 아침 운동으로 몸이 건강해졌다라는 느낌이 내게  삶의 새로운 시각과 새로움을 향한 열정을 불러 일으켰고 작품에 대한 열의가 움트고 있을 때였다.

좀 더 새롭게, 좀 더 나답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과 만신창이로 변해가는 국내정치와 비극의 어수선함 속에서 나만의 정체성을 유지하기에도 어렵게 느낄만큼 힘든 일들이 벌어졌고 그 여파는 해를 넘기고도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인본에 대한 회의가 일말의 기대감으로 바뀌길 바라는 희망과 기대 속에서 소박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기대감도 높아갈 때였다.

 

초가을에 남아돌던 마일리지를 쓴다는 핑계로 나 혼자 짧은 여행을 가지고 싶었고, 며칠 도쿄에 다녀왔다.

장인이 재작년에 돌아가시고 난 후라 일본에 머무를 거쳐가 없어진 지금, 당연히 호텔 숙박과 여행자라는 역에 충실한 짧은 여행은 한국에서 뒤따라온 폭우 탓에 비를 맞으며 도쿄 거리를 걸어 다녔고, 장인이 모셔진 절과 평생을 사셨던 집, 아직도 남아있는 문패, 이제는 안 보이는 앞집의 늙은 골덴 레트리버, 오래된 유아원에서 퍼져 나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들이 한적한 주택가를 풍요롭게 만들어 가고 있었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세상의 시간은 현재진행형이고 개인의 추억은 이미 기억 속으로 사라진 듯 했다.

 

그리고 시작된 오래간만의 작업과 뒤따라온 피로감이 나를 휘감고 있을 때였다. 소변의 색깔이 노랗게 변했다는 것을 느꼈고, 동네 병원에 가서 가벼운 검사를 한 그 결과는 참혹했다. 결국 대학병원 응급실로 제 발로 걸어 들어 갔고, 이어진 검사와 금식들로 나날을 보내야만 했고 두 달의 괴로운 투병과 진단 진료 속에 항암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담도암.

지금도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당장 죽을 것 같던 시점에서 치료 받을 땐 일단은 금방 안 죽는다더라는 확인 되지 않은 낭설까지 누가 얘기했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다.

 

암이란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황당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어? 내게도 암이 생긴거야"?라는 자문 속에서 스스로를 되돌아 보기 시작했다.

"왜? 내게?"나 , "왜? 나만?"이란 생각도 잠시 들긴 했지만,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많은 기억과 사람들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나란 존재를 찾기 시작했고, 나의 존재가 어떻게 세상 속에서 존재 하고 있었나 하는 궁금증과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지. 나는 뭐지? 하는.

 

내가 태어난 곳은 왕십리라고 한다.

6.25동란후 많은 지방의 피란민들이 서울로 몰려와 살기 시작했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사대문 밖 왕십리 쪽에 많이 몰려 살기 시작했다. 지금은 없어진 광무극장 뒤편에 월세방에 세들어 살 때 저녁밥 짓다 나를 낳앗다니 급작스럽게 태어난긴 했나 보다. 내 기억에는 없다. 세 살인가 네 살 때의 어렴풋한 기억은 흑석동으로 이사와서 명수대극장 앞에 쌀가게(싸전)를 할 때의 기억이 아주 조금 있다. 그 후 조금 위로 옮겨서 쌀가게를 할 때부터는 명쾌한 기억이 있어졌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셋방을 살아서 밥 때 아니면 도랑에서 놀거나 집 뒤의 조그만 마당에서 말속놀이나 자치기를 하며 놀았다. 영신여고(중대부속여중고) 뒷마당에서 흙바닥에서 뒹굴며 놀거나, 성냥을 몰래 갖고 와서 불장난하고 놀기도 했다. 국민학교 갈 때쯤 만화가게 가서 구경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당대의 최고 인기만화는 라이파이 였다. 신간이 나오면극렬한 눈치싸움이 극에 달했고 현찰 갖고 오는 아이의 손으로넘어가기 일쑤였다. 당시 1원만 내면 무제한으로 볼 수 있는 가게였지만 만화 붐이 일면서 점점 비싸지기 시작했다. '땡이'나 '삐삐' 만화가 나올 때는 만화가게가 만원이 될만큼  엄청 붐비었다. 삐삐 만화 중에 도둑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주인공이 범인과의 연락암호였던 피아노 소리를 바꿔서 도레미파의 '파' 건반만 계속 두들겨서 도둑이 땅만 죽어라고 파서 결국 구덩이에서 못 나와 스스로 잡힌 장면 인상적이었다.

영신여고 뒷동네 언덕에서 놀 때, 집에 들어 오니 화폐개혁이 됐다고 오십환 동전이 5원으로 바뀌었다고 어머니가 가르쳐 주었다.시간이 지나 못 바꾼 오십환 동전(이승만 얼굴이 조각되어 있던)이 쓸모가 없어져서 길에 버려지기도 했다. 혹시나 하고 이걸 들고 구멍가게나 중국집에 가서 오십환 동전 받아요? 하고 물어 보던 기억도 있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나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허기지게 해서....." 란 말을 자주 듣고 살았는데(커보니까 실감을 했지만), 남들에게도 쟤는 '허기진 애'라서란 말을  자주 했고, 나도 들은 기억이 많다. 전후 빈민의 삶에서 산모의 영양이 부족했을거고 바로 동생이 태어나서 나를 건사하지 못했을거란 추측이 든다. 좌우지간  '허기진 애'로 산으로 들로 잘 뛰어 놀다가 보면 배가 고파지면 집에 와서 찬밥이나 누룽지를 물에 말아 먹던 기억이 많다. 어릴 때 제일 괴로웠던 것 중의 하나가 배고픔이었다. 왜 그리 배고팠던지....

 

장난감도 잘 없던 시절에서 싸구려 플라스틱 장난감이 쏟아져 나올 때였지만 사달랬다간 돌아오는게 주먹질과 집안 형편 모르는 놈이란 질책 받는게 익숙한 시절이라 왠만한 건 나무를 자르고 못 박아 만들어 노는게 야단 안 맞고 놀 수 있는 즐거움의 하나였다. 물론 번쩍번쩍 빛나는 장난감도  갖고 놀 수 있는 행운도 한 두번은 있었다. 가물에 콩나기로 맨치.

 

노량진에 전차가 다닐 때라 어머니 손 잡고 전차타러 한 번 가본적이 있기도 하지만 , 무서움의 승차감과  3원인 편도 요금이 두 명이 타면 5 원으로 싸진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강인도교를 지날 땐 다리 전체가 엄청 떨기도 했다. 무지막지한 진동 땜에 걸어가다가도 전차가 올 때쯤이면 두툼한 난간이나 교각을 붙잡고 두려움을 상쇄시키기도 하였다.

 

내가 살던 흑석동이란 동네는 3 개동으로 나뉘어진 동네였다. 북쪽으로는 한강이, 동쪽으로는 국립묘지가 남쪽까지 어우르고 있고 그 바통을 이어받아 중앙대학교가 남쪽부터 서쪽까지 방패막이하는 분지 같은 동네였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북쪽으론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동네여서 한강이 삶의 숨통을 티게 해주는 놀이터이고 어린 애들에겐 공포의 강이기도 했다.

국민학교 다닐 때, 방학안내문에 항상 등장하는게 여름에는 물가 1 M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는거였고, 겨울에는 영하 20 이내로 내려가지 않으면 한강에서 썰매 타지 말라는 거였다. 사실 간간이 익사사고가 발생했고 여름방학이 끝나 개학날에 교실에서 출석을 부르면 안 들리는 이름도 간간이 있었다. 이촌동 쪽은 모래사장이 많고 경사가 완만한 강이었지만 흑석동 쪽은 강물이 절벽을 패고 돌아가는 지역이라 물속 경사가 심해서 물가에서 2~3m 만 나가도 어른 키 정도로 깊어져서 제대로 수영을 하지 않는다면 거의 자살행위같은 위험한 지역이기도 했다. 한강에서 보트경기나 수상스키 타고 시작하는 곳이 흑석동이라 지금의 명수대초교 쪽에 조경시설이 있었다. 어릴 때 수상스키 타는 것도 구경할 수 있었다. 비키니는 아니지만 수영복 입고 타는 아가씨들도 당시에는 꽤 볼 수 있었다.

겨울에는 당시 오염된 한강이 아니었고 날씨도 추웠던 관계로 빙판의 두께가 1 m 이상 얼기때문에 스케이팅링크가 한강 위에 만들어졌는네, 썰매타는 애들은 못 들어가지만 스케이트를 빌려 탈 수도 있었고, 자기 스케이트를 갖고 와서 날을 갈고 타기도 했다. 한강이 얼면 빙질이 상당히 좋아서 철사 구부려 만든 썰매는 동서남북으로 막 돌아다닐 만큼 방향성을 상실하기도 했다. 당시 유명한 스케이트 메이커는 '전승현스케이트'였던 걸로 기억한다.

 

연탄불에 올려 놓은 크 냄비 속의 오뎅을 사 먹는 사람들이 부러웠던 어린 시절이었다. 빙판 위에서.

 

 

DSC09460.gifDSC09460.gif

 

은로국민학교에서 바라본 중앙대학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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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자리가 명수대극장 자리. 새마을금고 자리가 흑석동으로 이사와서 처음 연 쌀가게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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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보이는 곳이 두번 째로 쌀 가게 하던 곳. 이곳에서 십년 정도 살았다.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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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등교 길에 보이는 교회. 이 교회도 몇 년 나갔었다.

 

DSC09411.gif

 

좁은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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